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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재공>둔세암공휘윤옥묘표(遯世菴公諱潤屋墓表)
遯世菴公諱潤屋墓表 遯世菴玉川趙公諱潤屋墓碣銘並序樹此阡頭用衛神道嗚呼昔在李朝莊陵之終冤抑凄切是誠天下萬古所未見之燮兇而極룍也至痛也實無君無父之日滅倫斁常無以加千此焉三角驚駭漢水嗚咽當時危亡尚忍言哉死六之慘不絶而起三族之禍連發而作忠義日殄人皆色尸族踵斧鉞開口縷絏柑制全域莫敢誰何彝性所在雖婦孺樵牧洞知君臣大義之不可癡况食君之食衣君之衣委質人臣者乎非殞身殉節則擧遯世自靖雖以所値之不同或生或死不貳其志則一也維時趙公不屈於威武不렍於富貴辦義理於是日垂名節於來世偉乎猗哉公以歷司諫升承旨堂上在政院聞首陽受禪痛哭欲無生投紱退隱淳昌之南追山下題其室曰遯世自以爲伴猪翁與世息交絶遊謝市浮榮如脫弊屣終不就仕日與申歸來末舟張遯菴肇平志節相契彷徨乎殘山剩水誦伯夷之傳歌淵明之辭俯仰慷慨若將終身盖其托意榛苓至死不燮之操尤不可誣也又以一鄉同志約契十老即李公允哲安公正金公博韓公承愈兩薛公山玉存義呉公惟敬及申張二老是也當與生六臣同其調世稱十退老幽隱晦跡公之節行想其歸來遯菴兩公氣像大畧可以侔倣矣公之雲仍即曾孫諱德隣號慕菴白淳昌寓於高敞使臣院仍子孫世居焉公諱潤屋字修自號遯世菴系出玉川而胄于麗朝侍中諱璋累傳諱元吉玉川君諡忠獻公之六世孫也高祖諱龜山司正曾祖諱士淳沔川郡守祖諱溥正言考諱希忠玉果縣監妣清州韓氏諱京鎬女公生於太宗十七年丁酉卒于成宗二十年己酉壽七十有三世襲簪纓之族也世宗朝登文科歷踐華堂端廟之終無意仕宦隱於深山終埋於邱壑而無聞天地悠悠徒增士之悵也墓自淳昌福興緬襄于牟陽西仁川之上坐狗山子坐原時値大韓光復後初癸亥四月也當時力微不能具表碣令纔戮力六尺貞珉竪於塋域公之節行可謂報應於百代之下矣公之後裔修勳甫屬余撰錄自顧朴鄙不敢猥當而羅絲顚末以俟立言之君子云耳銘曰維湖之南賢良攸華文獻承家遺風不匱相世宦遂榮樂忘君循韋布獨嗣芳芬父勗祖貽利後義先有或登廷譽睿一人承旨之仕會時薦瘥有丹不渝蹈險無差疾號颶浪霜雹來加檣摧袉裂覆舷猶摩滄波渺望望一碧手折芙蓉擘涕朝夕荃豈我遠若須雲際知我悶我漢山如畫舍而不暝所恨伊何永藏牟陽仁川之涯有裔追慕辛勤亦久乃抱厥遺千里是走寤懷徃昔有攢干臆用存其人永矢無斁 歲舍辛未天中之節 成均館 典儀 延日 鄭知海 撰 둔세암공휘윤옥묘표(遯世菴公諱潤屋墓表) 遯世菴玉川趙公墓碣銘 이를 靈域에 세워 길이 神道를 護衛한다. 아! 옛적 李朝莊陵(端宗의 墓號) 末年에 있어 冤痛抑欝함이 凄切했음은 두말할 것 없이 天下萬古에 있어 듣도 보도 못한 燮兇이요 極慘이며 至痛한 일이라. 實로 無君無父한 일이며 滅倫斁常한 行爲가 이에 더할 수가 없었다. 三角山이 놀래어 흔들리고 漢江水도 슬퍼하며 嗚咽하고 흘렀으니 當時의 危亡한 모든 일은 차마 어찌 입으로 옮기여 말할 수 있겠는가. 死六臣같은 慘變이 繼續해 일어나고 三族을(本生, 外家, 妻家) 連發問罪하는 禍端이 連이어 일어나니 忠義한 人士가 날로 禍를 當하여 사람마다 死色(죽은 사람의 얼굴빛)으로 戰戰兢兢히 날을 보냈으며 아차 잘못하면 不知不識間에 斧鉞(極刑)이 내리어 다들 입만 벙긋하면 오랏줄이 몸에 얽혀 全國中이 敢이 누구라고 避할 수 있었으랴. 죽은 체 겨우 숨을 通할 뿐이다. 그러나 彝性의 所在를 누라서 막으리요. 비록 婦孺나 樵牧이라도 君臣의 大義를 어찌 廢할 수 있으리요. 恨嘆하고 咀呪하는 怨聲이 國中에 가득했거늘 하물며 인군의 祿을 먹고 인군의 나라 옷을 몸에 입은 人臣된 者야 더더욱 말해서 무엇하랴. 몸을 殞하여 忠節에 殉하지 않으면 擧皆가 官을 버리고 世上을 등져 山野에 行跡을 감추어 不義 不忠 不貞 不倫에 물들지 않으려 했으니 비록 境遇와 時期는 各自가 殊異하나 死生間에 貳志를 갖지 않고자 함은 同一한 意志이다. 때에 趙公이 威武에 屈하지 않고 名我에 眩惑하지 않아 春秋義理를 이날에 辦別하여 名節을 後代에 死守해 왔으니 크고도 壯한 行爲이다. 公이 司諫院의 職을 贈歷하고 承旨堂上官職에 올랐으니 政院에 있다가 首陽大君이 受祥하다는 報를 듣고 痛哭하며 살기를 求하지 않았었다. 官職을 헌신같이 버리고 南으로 淳昌땅 追山(밀재)속에 숨어 居室에 遯世라 公懸하고 스스로 伴猪翁이라 稱하며 사람과 交遊함을 끊고 뜬 世上 榮利를 끝까지 辭하여 다시 就任하지 않고 날로 申歸來末舟 張遯菴肇平과 志節로 相契하여 端宗(主人)이 남기신 殘山과 剩水에 彷徨하며 때로 伯夷의 傳과 淵明의 歌를 한 숨으로 읊고 웅얼거리며 俯仰慷慨하여 終身토록 榛苓속에 몸을 두어 不變의 志操를 읊조리니 어찌 一言半辭의 於張이 있으리오. 또한 一鄉同志와 合流하여 十老라 約契하니 即 李公允哲 安公正 金公博 韓公承愈 兩薛公山玉存義 呉公惟敬 및 申張二老와 公을 合하여 十人을 指稱함이었다. 時人이 生六臣으로 더불어 同調라 하여 十退老라 云云한 것이 至今에 儀한다. 幽隱晦跡한 公의 節行은 生覺건대 歸來 遯菴 兩公의 氣像과 大畧이 等如한 바라. 公의 雲仍即曾孫諱德隣號慕菴이 淳昌으로부터 高敞땅 使臣院에 옮기여 寓居다가 子孫들이 世居하게 된 것이다. 公의 諱는 潤屋字하여 修自號하여 遯世菴이라 했다. 系出은 玉川이니 玉川氏가 麗朝에 顯出하여 侍中公 諱璋과 累傳 諱元吉은 玉川府院君이다. 諡曰 忠獻公이니 이 분의 六世孫이 된다. 高祖는 諱龜山 司正이요 曾祖는 諱士淳이니 沔川郡守이며 祖의 諱는 溥이니 正言이요 考의 諱는 希忠이니 玉果縣監을 지냈다. 妣는 清州韓氏 諱京鎬의 女이라. 公의 生은 世宗十一年 明宣德四年己酉하고 卒은 燕山七年 明弘治十四年己酉하니 壽七十有三이라. 世襲籍纓之族이니 世宗末에 文科에 올라 華堂으로 두루 밝은 端廟末에 仕宦에 뜻이 없어 深山에 숨어 마침내 邱壑에 묻히여 無聞하니 天地가 悠悠하여 한갓 志士의 슬픔으로 더할 뿐이다. 墓는 淳昌福興으로부터 緬襄하여 牟陽西쪽 仁川위 坐狗山子坐原에 安藏하니 때는 大韓光復後 첫 癸亥四月이었다. 當時에 力微不及하여 表碣을 갖추지 못했더니 이제 와서 겨우 出力하여 六尺 貞珉으로 塋域밑에 세우게 되니 公의 빛나는 節行이 百代下에 報應될 兆朕이라. 公의 後裔 修勳甫가 余에게 撰錄을 屬托하니 自顧하건대 以我朴鄙한 處地로 猥濫히 當役함이 不敢이나 羅絲願末로서 立言君子의 正言을 기다리는 바이다. 銘하여 曰 湖는 南忠義鄉에 賢良이 모이였네, 文獻公을 이은 古家 遺風이 그대로네. 世上 벼슬아치 榮樂을 貪해 忘君棄父 例事이나 循循한 韋布로서 홀로 芳芬이었어라. 父昴祖貽代로 하여 義理에 살았으니 我朝廷에 나가면 謇謇한 一人이었네. 承旨에 出仕하여 때를 잘못 만났구나. 一片丹心 곧은 마음 僉難을 目取했네. 颶風巨浪 몰아치고 서리우박 나리었네. 돗대도 부러지고 破船되었거만 오직 옛 님을 그리워서 맨손으로 어루만져 한사코 안 놓았네. 漢海속에 浮沈하며 望望一碧 어이하리. 내 어이 님을 잊어 멀리서도 바라보니 아시는지 모르는지 漢陽千里 아득하오. 眼이 되어 눈 못 감아 魂이라도 寧越땅에 자주가리. 公의 忠瞑牟陽땅 仁川上에 永藏하니 後孫들의 追慕한 至誠 辛勤함이 얼마인고. 公의 遺跡 품에 안고 千里 먼 길 찾아왔네. 지난 옛일 새로 生覺 臆中이 막히노나. 이 일을 契職하여 永永無斁 記錄한다. 歲舍辛未天中節에 成均館 典儀 延日 鄭知海는 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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